쓰고싶은 이야기가 생겼을때, 바로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을 해뒀다.

그리고 오늘처럼 잠이 잘 오지 않는 주말 밤 어느 한 줌에 다시 꺼내어

평온한 얼굴과는 다른 조급한 손가락으로 끄적거린다.

 

 

모니터안에는 글을 쓰려고 열어둔 창이 하나,

그리고 오른쪽 한 귀퉁이에 전남자친구의 카톡대신 자리하고있는

남자 J와의 대화창.

진탕 술을 마셨던 그날 밤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하루에도 몇번씩 서로에게

안부를 묻듯 모든 일상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과 나를 이어주고 있는 공통점.

그것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와 보라가 그랬던 것처럼,

연인이 가장 힘들때 놓아버려서 남겨져버렸다는 것.

 

 

그런것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이어주고 있네요.

 

 

 

 

 

 


 

 

 

 

 

 

 

 

 

 

 

 

 

지난 화요일이었다.

지독히도 예쁜 눈이 휘날리던 날이었다.

눈이 내린다며 다들 들떠서는 창밖을 바라보고 업무는 뒷전이었다.

연말은 이런게 좋았다. 포근한 마음들이 하나둘 포슬포슬 쌓이는것만 같으니까.

그리고 전날 본 겨울왕국2의 엘사가 생각이 나서 그런지 또,

저절로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기도 하고.

툰트라 맨땅의 딱딱한 흙같았던 마음에도 그렇게 따뜻한 눈이 내려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J는 그런 내 마음의 눈같은 사람이었다.

 

 

J는 사실 같은 회사 다른팀의 대리다.

몇주전부터 나는 야근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이별+야근 크리가 겹쳐서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가끔 울곤 했었다.

그러던 중 간만에 일이 일찍끝나 퇴근을 하던 찰나에

복도에서 터덜터덜 걷고있는 나를 그가 뒤쫓아 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냥 그 한마디에 왈칵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그냥 요즘 좀 힘들어서요.."

 

 

대부분은 이렇게 말하면 힘내라고들 한다.

 

 

"사람이 힘들어요? 일이 힘들어요?"

 

 

나는 이별때문에 사람도 힘들었고, 야근때문에 일도 힘들었다.

 

 

"둘다요."

 

 

"아."

 

 

"저 사실은 헤어졌어요."

 

 

"나도."

 

 

8층부터 1층까지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깊은 감정같은 것을 느꼈다.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우정어린 것일수도,

그래서 안타깝다고 느낀 것일 수도,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느낀 것일 수도.

우리는 다들 그러하듯 안부의 술자리를 약속했다.

 

 

"다음에 술한잔 해요."

 

 

그냥 하는 말인줄을 알았으면서 굳이 저말을 기억해내서는 기어코 그와의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를 하러 가는 길은 거의 첩보작전수준이었는데,

같은 회사였고, 우리회사는 소문이 한번 나면 KTX급으로 빨리 퍼지니까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안됬다.

보통의 퇴근할때처럼 내일뵙겠습니다 이지랄을 하니 웃음이 나오려는걸 꾹 참았다.

역앞 고기집에 들어가서 그가 패딩을 벗는데 아. 취향저격.

와이셔츠에 니트 스웨터라니, 너무 반칙이잖아.

 

 

그와는 숨쉬는 시간보다 말하는시간이 훨씬 많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대화가 잘 통했다.

나는 그가 5년이나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왜 헤어졌는지가 궁금했고,

그는 내가 이별과 재회까지하고 결혼준비까지 하던 남자친구와 왜 헤어졌는지를 궁금해했다.

할말이 너무 많았고 들을말도 많았다.

아니 사실 그런 얘기따위 중요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스스로에게 '나는 이사람이 왜 헤어졌는지가 궁금해서 만나는거야'라고

되뇌어 보기도 했지만 아니야. 사실은 난 당신이 궁금했던 거야.

나의 뒷모습, 걸음걸이만 보고도 무슨일 있냐고 물을만큼 섬세했던 당신이.

 

 

당신이 입고 있던 옷, 신발, 메고있던 가방, 패딩의 브랜드,

머리숱은 얼마나 있는지, 입술은 어떤 모양이고 어떤 색인지,

밥먹을때는 어떤 손을 쓰는지,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

그리고 섹스할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조만간 볼 수 있을까요?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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