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를 내리고 드르륵 멈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국뽕 가득한 미세먼지가

내 콧구멍 속으로 들어와 켜켜히 쌓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마주한 소꿉친구를 반기듯이 나의 찡그린 인상에도 아랑곳않고

마구 밀려들어오기 바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비행기 끝난 커다란 새한마리가 쉬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와 같이 끝나버린 나의 여정도 곱게 접어 그렇게

가슴 한구석 이름모를 책장에 마음대로 쑤셔넣었다.

느릿느릿 그곳을 빠져나와 리무진 버스에 몸을 던지고 멀어져가는 인천공항을 뒤로한채

석양빛에 눈을 감았다 뜨니 집앞에 도착해버렸다.

 

 

지난주쯤 나는 꿈과 같았던 한달동안의 유럽여행에서 이렇게 현실로 돌아왔다.

내게 남은것이라고는 취직 전까지 내 통장에서 지켜야 할 퇴직금 약간과

다시 돈을 벌기위한 취직, 그리고 취직을 위한 이력서 작성

같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또 한가지.

생각만 해도 멀미가 치솟는 그 한가지.

 

나의 그자.

 

 

 

자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일어나.

 

 

 

 

 

 


 

 

 

 

 

 

 

 

 

 

 

 

 

런던에 막 도착했을때는 시차 적응따위 필요 없을정도로 나의 바디는

다행히 여행 할 수 있는 체력을 든든히 받쳐주었다.

근데 이번에 귀국할때 비행기에서 안자고 버텼어야 했는데

기내가 엄청 건조한데다가 장시간의 비행 및 여행의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오면서 결국 난

비행기안에서 눈을 감고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도 시차때문에

새벽 6시에 자고 오후 3시쯤 일어난다.

아니 이게 사실은 시차 때문인줄 알았다.

근데 그냥 나에게 닥친 현실에 자려고 누워서 눈을 감으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의식의 흐름따라 나의 의식을 자꾸만 깨운다.

밤낮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생활을 한다.

이건 완전히 불면증이다.

내 사주에 불면증을 조심하랬는데.

 

좆됬다.

 

 

 

귀국하고 D를 처음 마주한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너도 드디어 갔다왔구나! 보고싶었어. 우리 섹스할까?'를 온 얼굴로 말하던

그 강아지같던 퍼피페이스.

내 시력이 나빠서인지 뒤에 꼬리도 좀 흔드는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의 신체리듬상 섹스는 힘들듯 하여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라 하지만 일방적으로 내가) 여행 이야기를 하였다.

유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의외로 에피소드라 할 만한 것들이 꽤나 있었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였다.

이상하게 유럽여행 다녀온 얘기를 할때의 그의 리액션은 그다지 음 공감이 잘 안되는모양이었다.

본인은 철저하게 혼자 여행했는데 나는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서인가?

나는 유럽여행 다녀온 썰들을 엄청엄청 풀고싶단말이야.

 

 

D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과음을 하고 다음날 새벽에 오바이트를 하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것이 생각이 났다.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것이 보통 문제가 아닌게 맞긴 맞는가보다.

 

이사람과 내가 과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이사람이 아닌 사람하고는 가능할까?

지금도 이렇게 서운한것들이 많은데 계속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걸맞는 사람인걸까?

나는 결혼이 하고싶은걸까?

돈은 어떡하지?

 

나만 이런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건 알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상대적으로 가장 크게 와닿는 문제들이니까.

 

 

 

이틀뒤에 한달간 미뤄둔 숙제를 해치우려 D를 다시 만났다.

사실 숙제라는 표현이 옳바르지 않은것 같긴하다.

그가 좋고, 만지고 싶은건 당연하지만 뭐랄까 둘만있는 공간을 찾으려면 모텔뿐이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섹스를 하게 될텐데.

뭔가 내키지 않았다.

내 마음이 정리가 안되서, 내 심신이 그런 기분이 안드는데.

물론 키스하고 안아주고 그런거 참 좋은데 섹스는 뭐랄까, 당분간은 좀 안하고 싶어.

 

내가 여자라서 그런걸까?

내 성격이 그런걸까?

내가 가진 고민이 당신과 관련있는것이기 때문일까?

이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이 되면 마음놓고 너와 섹스하고 싶을까?

이런마음이 평생 지속되기는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꺼내볼까.

혹여나 당신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나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여행에서 얻은 교훈중에 하나는

그 일이 닥치기 전까지 무서워 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는데.

 당신과의 문제에 관해서 어쩌면 더 겁쟁이가 된것 같아.

 

 

 

어쩌면 지금은

'섹스'라는 그 두 글자에 속박되어서

'섹스'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인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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