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에 입주한지 약 6개월 정도가 지나간다.

여름의 빗줄기, 비에 젖은 약간의 흙냄새와 아카시아향, 그리고 어느새

햇살과 함께 바람에 나리는 커튼 옆 책상에 덩그러이 놓여진 화가의 팔레트처럼 마구 물들어져있는 가을의 풍경.

그리고 커피향과 땡 하고 울리는 오븐에서 풍기는 빵구움 냄새.

 

 

나는 그동안 불안이라는 숙적과 맞서내느라 잊고 지냈던 어느 지난날의 향수들을 이제서야 조금 되돌아본다.

그래.

인생이라는게 아픔과 괴로움이 있어야 작은 행복에도 이렇게 미소짓듯이,

언젠가는 이 불안도 결국 나의 세월에 잘 녹아들어 나를 더 여물게 해주지 않을까.

움켜쥐었던 내 심장과 마음을 양손으로 감싸주어 더 단단하게 보호해주듯.

 

 

그리고 이런 상황 속 이지만 나의 신혼은 꽤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며,

남들처럼 두근거림도, 낯간지러움도 모두 빚어내고 있다.

 

 

 


 

 

 

 

 

 

 

날도 채 밝지않은 어스름한 아침동안 나는 당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코도 골고, 굉장한 잠꼬대를 하며 방귀를 뀌어대는 그 순간이 귀엽다.

애기같이 냠냠쩝쩝 입맛을 다시며 침을 흘려도 귀엽고, 설잠에 뽀뽀라고 외치면

문어마치 입술을 내미는 그 모습도 귀엽다.

나보다 20센치는 훨씬 큰 당신이 나는 왜이렇게도 귀여운 것인지.

어느 기록에 내 옆에서 잠드는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겠냐고 썼던게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금방 당신의 잠든 얼굴속에서 행복을 찾아내고야 만다.

 

 

남자는 다 드로즈를 입고 나시따윈 정장에 흰 와이셔츠 입을때나 입는 줄 알았는데,

후줄근한 핫팬츠 핏의 트렁크와 겨드랑이 다 늘어난 아저씨 나시를 고집하는 당신을 보며 헛웃음친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위해 설거지를 마다않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같이 갠다.

니 일 내 일이 어디있냐며 앞장서서 분리수거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뒷모습이

나는 자꾸만 만지고싶고, 껴안고만 싶다.

 

 

어쩌면 당신은 나의 불안이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내가 불안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나를 향한 감정은 절반도 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공황장애가 터질때마다 당신에게 의지하고 우는것이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에게 의지하는것은 그만큼 당신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야.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불의에도 화를 내는대신 참아가며 분노라는 감정을 점차 잊어가고,

사회적인 지위와 그에 맞는 벌이가 어느정도 충족되면 다른이유로 우울해도

난 이만하면 잘먹고 잘사니까 우울하다는 감정을 외면하게 되는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고 외면해가면서 무뎌지면 결국 행복이라는 감정마저 

결여되버린 사람이 되는것이 아닐까.

그림자가 없으면 빛이 없듯이 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딛고 받아들였을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부정적인 감정이 없다면 느끼기가 어려울테니.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너무 예민해져서 두근대는 이 심장을 설레어서 두근댈때조차 공황으로 느껴버리니

매번 약으로 억누르고 잠재워서 감정 자체가 둔해져버리는건 아닐까 걱정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불안과 행복을 모두 기록하고

어느것에서 불안에 젖어가는지, 어느것이 나에게 행복을 스미는지 생각한다.

 

 

 

어쨌든 고맙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