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올 겨울에는 눈을 보기가 참 힘든것 같다.

첫눈처럼 내 살갗에 소리도 없이 닿았던 그 순간과 같이

올해의 눈은 신기하게도 잊을만 하면 갑자기 쏟아붓는다.

 

그렇게 펑펑 눈이 내리던 어느 월요일 아침, 그리고 소복이 눈이 쌓인 예쁜 도로.

누군가 슈가파우더를 온 세상에 뿌린것처럼 달달해 보이는 온 세상이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가, 참 정겹고 따뜻했다.

 

 

회사 탕비실에서 마주친 그의 손에 들려있는 오메기떡과 오셜록 쇼핑백.

나도 모르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제주도 다녀오셨어요?"

 

 

라고 묻자,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포근한 입술.

 

 

"네. 주말에 갔다왔어요."

 

 

 

같이 다녀왔던 제주도를 서로 모른척 하는게 얼마나 재미있던지.

처음 그와 소고기를 먹었던 그날이 괜스레 생각이 또 나더라.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르는 이번 제주도 여행의 파노라마가

홍차향기를 타고 퍼져 지그시 눈을 감게 만든다.

 

 

 

 

 

 

 


 

 

 

 

 

 

 

 

 

 

 

 

 

여행을 가기 이틀전에도 싸웠었다.

별거 아닌일로, 서로의 상황이 좋지 않아 투정을 부리듯 싸웠다.

그러면서도 칼로 물을 베어내듯 칼로 도려낸 자국조차 남지 않게 또다시 붙어서는

눈도 잘 뜨지 못하는 그를 깨워가며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해외 출장을 자주다니기 때문에 멤버십 등급이 높다는건 알았지만,

일반 등급인 나도 그를 따라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고,

비행기에 탑승할때도 같이 우선 탑승할 수 있다는게 참.

멋있으면서도 뭔가, 내가 애기애기해진 기분이었달까.

멀뚱멀뚱 서있는 나에게 그가 살짝 손짓하면 쭐래쭐래 여기 서도 되냐면서

의심반 믿음반의 눈빛으로 그의 옆에 어색하게 다가섰다.

 

 

유럽여행을 갔다오면서 왕복 4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탔었어도 아직까지 나는

비행기가 이륙할때 주는 그 중력이 설레고,

구글지도 처럼 보이는 땅이 설레고,

창문밖으로 보이는 알래스카의 어딘가를 닮은 구름밭이 설렌다.

옆에서 핸드폰 폰게임을 하며 무료한 비행시간을 보내는 옆자리의 그자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나와 같이 이 시간을 설레주지 않으려나 하고 계속 그의 게임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비행기가 다시 구름을 지나 고도를 낮춰 제주도에 다다랐을때,

제주의 하늘에서 바라봤던 그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달 표면처럼 곳곳에 솟아오른 오름들과, 그 가운데 우직하게 자리한 한라산.

서울의 스카이라인과는 다른 낮은 집들.

진한 녹빛을 머금은 촉촉한 땅.

그리고 그 땅을 둘러싼 푸른빛의 바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제주도, 제주도 하는지

비행기 창문을 뚫고 비치는 햇살처럼 풍경이 스며왔다.

 

 

29년 인생 처음 마주한 제주도는 이국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본것만 같은 그런 느낌.

한국이면서 한국이 아닌듯한 느낌.

그가 운전해주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평소에는 잘 부르지도 않는 노래를 쉴새없이 흥얼거리며

한라산의 언덕배기를 넘고 파도치는 바다를 건너 마주한 검멀레 해변의 깊은 모래색이,

그 절벽이, 그 울타리가, 신기하게도 영국 브라이튼의 '세븐시스터즈'를 떠올리게 했다.

그 하이얀 절벽과는 반대로 까만 검멀레의 모래들은 대조적이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영국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미친듯이 바람이 부는 절벽에 서서, 인생샷을 찍겠다며 그와함께 눌렀던 수십번의 그 모든 순간들이 다 행복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나부끼는 겉옷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의 광대마저 아름다웠다.

검멀레 해변에서도 행복한 이 순간을 언젠가 꼭 그와함께 벌링갭 세븐시스터즈의 끝자락에서

들이치는 파도에 눈을 감고 그와 함께 손을 잡은채 바람을 맞아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우리는 남들 한시간씩, 두시간씩 오만장 사진찍는 블랑로쉐에서는 정작 30분도 채 있지 않았으면서

산호로 이루어진 서빈백사의 거친 모래에는 발바닥이 찢어져도 사진을 건지겠다고 신발을 벗어던진다.

찬 바닷물에 모두들 엄두도 못내고 구경만 할때, 우리는 신발을 손에들고 멋없는 사진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찍는다.

아마 그러려고, 내가 원피스를 입고 갔었나보다.

이렇게 행복하려고 내가 그를 만났나보다.

 

 

 

니글대는 딱새우회를 질겅질겅 씹어도 좋았고,

쫄병스낵같은 맛의 꼬지말이를 먹어도 좋았다.

탄산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땅콩이 주재료인 막걸리가 특산품인게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정작 예상치 못하게 감귤 막걸리가 맛있었던것이 기억이 난다.

그가 내옆에서 코를 골아도 오늘 하루 운전하느라 수고했던 당신인데- 하며 웃음이 새어나왔다.

잠결에 나를 더듬는 손길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당신이란 사람은 항상 날 놀라게 해.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나 하고.

그런데 옆에 있으니까,

놀랄 수 밖에 없더라고.

 

 

 

 

 

화창했던 토요일과 달리 일요일은

제주도에 많은 3가지중 '바람'에 대해 찐하게 알게 해 주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간 오빠가 차가워진 몸으로 이불속에 들어와 나에게 살을 부비적 댔으니까.

나는 하마터면 뽁뽁이처럼 사용할뻔 했던 롱패딩을 자랑스럽게 꺼내입으며 체크아웃을 하러 갔는데

호텔 로비의 유리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낭창거리고 있었다.

고작 5미터도 안되는 차까지 가는데 몇번을 바람에 휘청거렸는지 모른다.

캐리어도 손에서 놓으면 그냥 굴러가는 수준의 강풍이었으니까.

그래도 좋다고 와랄라 웃으면서 호텔 앞 바다의 파도를 보러가고,

바람을 맞으면서 담뱃불을 피우려다 실패했다.

우리는 알프스 등반중에 눈사태를 만난 후 가까스로 쉘터를 찾은 산악인들마냥 어렵사리 카페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비록 원래 가려던 브런치카페는 가지 못했지만,

따뜻한 커피한잔과 파니니, 케이크로 가벼운 브런치를 먹을 수 있었다.

 

 

 

날씨는 계속해서 안좋아졌다.

진눈깨비와 우박이 번갈아 흩날렸다.

흐린 하늘의 오설록은 오히려 막 깨어난 새벽같이 더 운치가 있었다.

조금 허겁지겁 도착했지만 세이프였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차를 즐기는 시간을 가지라는 차분한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회사를 벗어낫다는 기분을 가져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가지 신기했던건 같은찻잎을 우려내는데도

그가 우려낸 차는 말갛고 부드러웠는데, 내가 우려낸 차는 깊고 진한 향과 맛이 났다.

차를 내리는것도 각자의 성격이 반영되나 싶어서 괜스레 웃음이 났다.

1시부터 시작되는 프리미엄클래스들은 중간에 애프터눈티처럼 즐길 수 있는 다과같은게 나온다.

총 4가지가 나왔는데 그중에 맘에 쏙 들었던 두가지.

생크림과 취나물 패스토, 말린 토마토를 얹은 미니 브루스게타와

제주도를 표현하는 녹차 무스케이크였다.

브루스게타는 부드러운 맛에 취나물 패스토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특히 녹차 무스케이크는 아래에 깔린 쿠키칩이 제주도의 현무암을,

녹차 무스는 제주 오설록의 자랑인 짙은 녹차밭을 표현하는것 같아서 물개박수를 쳤다.

당연히 보는것만큼 맛도 좋았다.

 

 

 

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거세졌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던 제이학센 바로앞의 바다에서는 정말

눈조차 뜨고있기 힘들었던것 같다.

당연히 담뱃불은 잘 타오르지 않았지만, 덕분에

담배를 피우려고 애쓴 그의 미간이 만든 최고의 허세샷이 나왔다.

흑돼지로 만들었다는 학센은 왠지모르게 유럽에서 먹었던 학센보다 느끼했던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경험이 어디냐며 나름 열심히 먹었던 것 같다.

오히려 흑돼지 로제 파스타가 더 맛있다는게 아이러니.

 

 

차를 반납하러 가는길에 특이한 오메기떡 매장이 있어서 들렀다.

날씨도 그렇고, 코로나도 그렇고 해서 그런지 느낌상 최근 사람이 별로 없었던것 같기는 한데.

그냥 갈까 하다가 여사장님께서 맛보라고 주신 인심에 반해, 오빠와 나 둘다 한 셋트씩 샀다.

일반 오메기떡과 달리 찰떡 아이스처럼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독특한 오메기떡.

날씨가 좋지 않으니 공항에 연락한번 해보라고 또 신경을 써주셔서

동네 단골집같은 마음으로 편하게 있었던게 유독 기억에 남는 가게였던것같다.

그 감동에 나는 회사에 돌아와서도 곧 제주도를 간다던 동료 M양에게

그곳의 오메기떡집은 꼭 가야 한다고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하루종일 바람은 휘몰아 쳤지만,

우리가 추억을 제주도에서 추억을 가득 안고 돌아가는 순간에는 더이상 바람이 불지 않았다.

서울에 눈이 한가득 쌓였다는 얘기만 엄마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소리없이 나리는 눈에 세상은 또 잠시 고요해지겠구나,

내일의 아침엔 오빠와 함께 제주에서 들고온 오설록의 추억 한잔을 마실 수 있겠구나.

잠시 비행기 창밖으로 빛나는 도시의 문명을 쳐다봤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지하철이더라.

꿈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핸드폰 앨범속에 찍힌 많은 사진들이

안심하라는듯 나열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