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독, 톡. 톡. 톡. 토독. 토도독!

 

 

어슴푸레한 새벽녘, 나의 평온하지 못한 뒤척임을 깨우는 이 달가운 빗소리는

얼마전부터 본격적으로 찾아온 여름을 알리는 내 새벽의 연인이자,

지나간 인연의 지독한 향수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비는 여름을 연주하듯이

점점 세게, 혹은 점점 여리게 자꾸만 나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그러면 결국 나는 그 욕망을 참지못하고 잠을 뒤로 한 채 일어나 창문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 순간은 마치 어느 오페라의 복도에서 홀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것과 같이

나와 비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열리며 진하디 진한 빗소리가 귓바귀를 타고 미끄러져

여과없이 고막을 울린다.

 

날도 채 밝지 않은 그때에, 그 푸르른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비릿한 물냄새를 맡고 있으면 생각나는

지난 어느 여름, 교복을 입고 있는 내가 그 빗속을 거닐며 잡았던 손 하나.

마주보던 안경 하나.

 

 

이건 어느 소녀와 소녀가 만나던

내 안의 영원한 여름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어딘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았고, 밥을 거의 먹지 못해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기록하던때였다.

등교길에 30분 남짓 타는 버스마저 현기증에 비틀거리기 일수였고,

그마저도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면 중간에 내려야 할정도로 심한 멀미에 시달렸었다.

수업시간에는 양호실을 밥먹듯이 드나들었고 반 애들은 그런 나를 동정 반, 혐오 반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주변에는 그런 나를 감싸안아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의 그 순수한 마음을 저버린 내가 이제와서 보고싶다고 한들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들 중에는 나와 정말 비슷하게 생긴 소녀S가 있었다.

친구의 친구 소개로 알게된 그녀는 밝고 재미있는 아이였다.

몸이 좋지 않은 내게 종종 찾아와 나의 안부를 묻고 가던 그런 친구였다.

관심사부터, 안경을 쓴 모습까지 닮은 우리가 친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오래걸리지 않았다.

 

내 건강이 안정을 찾을 무렵에는 주말이면 한강에 놀러가곤 했다.

분수대의 높이 솟은 물줄기에 젖어도 좋았다.

친구들과 야자를 땡땡이 친 날이면 학교 앞 운동장에 수의아저씨를 피해 구석에 모여서

노래를 듣거나, 흙바닥에 돌을 던지며 놀거나 했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면 몇개의 작은 별들이 마치 우리의 청춘에 감성을 더해주는것만 같았다.

다같이 누워서 의미없는 대화를 하기도 하고, 옆에서는 내일의 영단어를 외우기도 했다.

뭔가 드디어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것 같았고, 내옆에 그런 그들이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개를 돌렸을때 그녀가 옆에 있다는게 좋았다.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장마가 시작되려나봐. 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 때문에 땡땡이 치지 못한 자유의 영혼들이 모여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문제집을 파스락 거리고 있었다.

빈정대는 옆자리의 한숨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의 비가, 내가 좋아하는 비가 쉴새없이 내리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잠시 펜을 놓고서는 아예 의자를 돌려앉아 본격적으로 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이는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나의 시선이 점점 내 옆자리에 누워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따라 내려갔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눈동자를 채우는것이 내가 사랑하는 비가 아니라 그녀라니.

나의 후각을 자극하는것이 비내음이 아니라 그녀의 섬유유연제 향기라니.

 

 

"좋다."

"어?"

"너."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교실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잡힌 손목이 조금 아파왔지만 그보다 나의 마음 한가운데가 망치로 때린듯이 더 아파왔다.

그녀는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좋아해?"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숨기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사귀는동안 나름대로 꽤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잘 맞는 우리가 과연 성별에 구애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단지 그녀가 그녀이기때문에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연애는 그다지 퓨어하지 않았다.

만화나 소설에서처럼 플라토닉 러브만 하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러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손을 잡는것만으로도 좋았지만 나는 그녀가 점점 더 욕심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막지 않았다.

입술이 맞닿은 설렘도, 혀를 섞는 이질적인 욕구도, 귀를 적시는 타액도 모두 받아들였다.

들숨 하나에 눈을 질끈감고 날숨 하나에는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늘 거기까지였다.

옷을 벗긴다던지 그러한 행위는 없었다.

아마 그이상은 참을 수 없었을거 같아서.

 

하지만 나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어섰고,

결국 그녀의 쇄골에 멍이나 다름없는 검붉은 키스마크를 남겼다.

나는 그런 내가 점점 싫어졌다. 그녀를 소중히 하지 않는 내가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수용하려 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그녀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려는 그녀의 그 순수함에 현기증이 났다.

나에게 털어놓던 집안사정과, 걸핏하면 흐르는 눈물이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사귈때와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던 날 밤 헤어졌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목놓아 울었고, 나는 차갑게 돌아섰다.

 

 

 

한달? 두달남짓? 사귀었던 우리의 짧은 연애는,

비로 시작되어 그녀의 진한 섬유유연제 향기로 기억된다.

그녀에게 던지듯 건넨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간직한 채 몸만 커버렸고

본능적으로 차갑게 돌아서는 것을 깨우쳤다.

지금까지의 내 연애를 미루어보아, 역시 그녀로부터 시작된 연애의 습관같은것이 아닐까.

먼저 고백하고, 먼저 돌아서는 그런 나의 연애는

너로부터 시작되었나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여름만 되면,

장맛비가 내리면,

그 향기가 나를 스치면,

미안한 마음으로 너를 떠올려.

그리고 현기증이나.

아마 그 해의 여름은 영원히 내안에서 계속될것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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