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시기와도 같았던 열여덟의 어느 날.

 

아슬아슬한 절벽끝에서 눈을 가린채 방황하던 찰나의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바닥으로 추락하더라도 그런 내 손을 잡고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있었을 만큼

그녀의 시선이, 모든 세포가, 그녀의 우주가 나를 비추고 있었을것을 안다.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던 사람.

아마도 내 인생의 첫 구원자였다.

 

15년이 지나서야 마주하게 된 너의 진심앞에서

다 채우지도 못한 못난 나의 용기로라도 이렇게 글을 써.

전달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그것이 사치인것을 알기에.

 

 

 


 

 

 

 

 

 

 

 

어둠에 잡아먹히던 17살의 나와는 달리 18살의 나는

내인생의 어둠과 공존하는 것을 택했다.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그냥 받아들이는것이 편했다.

숨이 쉬어지지않으면 좀 괴롭다고 말할줄 알게 되었고,

좀 괜찮아지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살았다.

당장 앞으로의 숨 한번을 걱정하던 내가 무색하리만큼

대학교 진학을 걱정하는 평범한 여고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쩌다보니 같이 휩쓸려서는 어느새 내 옆에 있었던 너.

내가 다른여자와 사귈때조차 우직하게 내 옆자리를 지키던 사람.

 

 

난 그저 네가 어린 나이때 하는 동경과 이상 사이의 그 무언가처럼,

남들처럼 흔하게 하는 착각 그런것이라고 생각했어.

나와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니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너의 첫사랑조차 나로 바꿔버리고 싶었을만큼 내 생각보다 너는

훨씬 더 크게, 많이 마음 깊은곳에 날 새기고 있었구나.

 

너의 첫사랑이 다른사람이라는 말.

아니야.

너의 첫사랑은 나야.

네가 준 노트가 그걸 증명하고 너의 문장들이 그걸 의미해.

 너도 나처럼 누군가 첫사랑이 언제에요, 누구에요 묻는다면

그 긴 속눈썹을 아련하게 떠올리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첫사랑은 고등학생때였다고, 같은반 여자애였다고 말하길 바라.

 

네가 나에게 스몄던건 아마도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동질감 같은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너와 내가 닮아서. 엄한 가정에 책임만 가득했던 미련쟁이들이라서.

여유 없는 작은 18살의 가슴에도 꾸역꾸역 심은 나란 인간이

눈치도 없이 자꾸만 크게 자리를 잡아버렸던 거였어.

부모님 눈치를 그렇게 보는게 너무 안쓰러워서

지금의 내가 18살의 너를 끌어안고 다독여주고 싶다.

 

 

정말 웃기게도 난 너를 밀어냈음에도, 너는 나를 잊었을텐데도

희안하게 내 삶에는 나도 모르게 너의 흔적이 남아서

너와 비슷한 글씨체로 글을 쓰고, 그렇게 글 쓰는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너는 알고 있을까?

네가 남긴 그 마음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나는 10년도 더 지난 후에야, 몇일을 다짐하고 또 마음을 다잡은 뒤에서야

네가 준 노트를 펼칠 수 있었어.

그렇게 생각의 파도에 잠겨서 

야자시간 학교 옥상에 몰래 들어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끼고

MP3에 담긴 너와 나의 취향을 공유하는것을 추억해.

 

 

나이가 들면 아는 사람이 없는 영국에서 살고싶다고,

날 책임질테니 걱정말라며 베시시 웃던 너의 진심을 다한 웃음.

친구 집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혼자 쿨하게 오바이트를 하러 돌아서던 너.

너의 생일날 선물로 건넨 싸구려 카시오 시계.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너에게서 배웠던 수학.

그리고

추석때 너와 통화하면서 부담스럽다고 울던 나.

 

이미 커져버린 마음을 채 다 가리지도 못했으면서 아닌척, 쿨한척 날 대했던

어른스러웠던 너.

하지만 너도 그냥 네 마음에 보답받고싶었던 18살의 청춘 소녀였던거야.

 

 

너와 같이 영국을 가보고 싶다.

이 나이에도 나는 공황과 함께 살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데

왠지 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좋고 나를 잘 챙겨줄 것만 같아.

보통 나는 사람들을 챙기는 편이지만 왜인지 너한텐 의지만 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의지 할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좀 특별한 사람이길 바란다고 했지?

그래.

넌 내 인생에 아주 특별한 사람이고 강렬한 기억이야.

청춘의 한 페이지에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쁜 마음으로 나라는 지옥에 곤두박질 치던,

순수했던 18살의 소녀.

가라앉는 내 손을 잡고 진흙탕에서 같이 잠기던 나의 천사.

 

내가 준 선물하나, 그저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온 신경이 나에게 쏠려

손이 차가운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마냥 좋았다는 너에게

나는 참 냉정하고 제멋대로인 얼음 송곳이었다.

 

 

 

간신히 닿은 연락에도 너무 늦게 너를 마주한 죄로 불편함만을 느끼게 해버리고 말았어.

 

그 시절의 추억에 갇힌 나와,

그런 나를 불편한 말투로 버리고 싶어하는 너.

 

그러니 더이상 아는척, 친한척을 하지 못할 수 밖에.

그것이 너를버린 대가이고 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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